1572.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3월 20일)
오늘은 아침부터 봄비가 내린다. 우산을 들고 초등학교 정원의 만발했던 목련이 걱정되어 나갔다. 우산도 없이 빗소리를 듣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와인 이야기를 하는 날인데, 우선 시를 한 편 감상하고 시작한다.
봄비/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왠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와인을 읽지 않고, 오늘은 와인을 마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와인은‘원샷’하지 않는다. 원래 와인은 요리와 함께 마시기 시작하여 요리와 함께 끝내는 식중 주이다. 원칙적으로는 디저트가 나오기 전까지만 마신다. 이때 와인은 시각․후각․미각 등 오감을 총동원하여 마신다. 왜냐하면 와인의 매력은 색깔, 향, 맛 세 가지이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은 이를 최대한 감상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순간의 정신 집중으로 눈, 코, 입의 관련 기관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1) 우선 눈으로 색깔을 감상한다.
먼저 와인 잔의 줄기나 밑받침을 잡고 색깔을 감상한다. 와인은 일단 깨끗하고 맑아야 한다. 검붉은 색이거나 침전물이 많아 맑지 못한 것은 저장이 잘못되어 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이기가 쉽다. 어쨌든 불순물이 없고 투명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 들면 좋은 와인이다. 레드 와인은 오래될수록 색깔이 흐려지는 반면, 화이트와인은 색이 짙어 진다. 일반적으로 잘 숙성된 레드 와인은 자주색을 띤 진한 붉은색이다. 보석 가운데 루비를 연상하면 된다. 숙성이 잘 된 화이트와인은 연두색 빛을 띤 황금색이다. 오래될수록 연두색 빛이 사라지고 색이 짙어 진다. 프랑스의 소떼른느 지역 와인이나 아이스와인 같은 스위트 와인은 호박색을 띤다.
와인 잔을 돌려 소용돌이치게 하는 것을 ‘스월링(Swirling)’이라 한다. 글라스를 가볍게 스월링시키면, 우리는 글라스 내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방울의 흔적을 관찰할 수 있다. 이 흔적을 사람들은 흔히 ‘와인의 눈물(tears, 프랑스어 larmes) 혹은 다리(legs)’라고 부른다. 이 눈물은 와인의 힘(power)의 정도를 의미한다. 알코올 도수가 높거나 글리세롤, 당의 함유량에 의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당도를 높이기 위해 늦게 수확된 와인은 그렇지 않은 와인보다 더 두드러진 눈물을 흘리며 잔에서 떨어지는 속도가 더 느리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와인의 품질을 평가할 수는 없다.
2) 후각을 이용해 와인의 향기를 맡는다.
우선 잔을 그대로 들고 향을 맡고, 그 다음 와인을 손으로 들고 빙빙 돌린 후, 와인이 소용돌이 칠 때 와인을 코밑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단 비즈니스 식사일 경우에는 잔을 흔들고 냄새를 맡을 때 조심스럽게 하여야 한다. 또한 이때도 냄새를 맡으면서 와인의 부패 여부나 품질을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코르크 마개가 썩는 냄새나 식초 냄새가 나면 상한 것이다. 저급와인일수록 향기가 약하며 숙성이 잘된 고급와인일수록 풀 향이나 과일 향, 오크 향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향기가 오래 지속된다. 와인의 향은 원료인 포도에서 나는 과일 향, 이것을 ‘아로마(aroma)’라고 한다. 그리고 숙성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부케(bouquet)’라고 하는 향으로 구성된다. 품질이 좋고 오랜 기간 숙성된 와인일수록 부케가 강하다.
와인의 향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 향으로 나눈다. 와인의 향을 ‘코(nose, 프랑스어 nez)’라 부른다. 와인을 시각적으로 판별하는데 ‘와인의 눈물’ 또는 ‘와인의 다리’가 있다면, 후각적인 판별에는 바로 ‘코’가 있다.
첫 번째 코: 와인 잔을 아주 천천히 들어 잔이 흔들리지 않게 코로 가져가거나,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코를 갖다 댈 때 나는 향을 ‘첫 번째 코 또는 향’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코: 와인의 향을 최대한 발산시키기 위해 잔을 소용돌이치도록 크게 돌린다. 공기와 접촉해서 잠자고 있던, 미처 맡지 못했던 향기의 성분이 기화와 산화의 촉진을 통해 증발해 올라와 휘발성이 약해 가라앉아 있던 가장 무거운 향을 ‘두 번째 코 또는 향’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 코: 빈 잔의 향기를 이렇게 부른다. 와인을 마시고 난 후, 빈 잔에 남은 여운을 느껴본다. 잔 안쪽 면에 얇게 형성된 필름 막에서 분출되는 향이다. 잔을 그 다음 날 아침 닦다 보면 이런 향을 느끼곤 한다.
(3) 마지막으로 입 안 전체와 혀가 적셔질 수 있도록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넣고 공기를 빨아들여 입 안에서 서서히 굴리면서 맛을 본다.
입 안에서 와인을 굴리듯이 하면서, 혀 위에서 천천히 단맛, 쓴맛, 신맛 등을 느껴본다. 즉 혀 전체를 다 활용하는 것이다. 혀가 입 속에서 와인이 발산하는 온갖 자극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때 맛들 사이의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를 이루어 야만 좋은 것이며 어느 하나가 특별히 강한 맛을 내면 품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와인의 단맛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기분 좋은 맛이다. 이 맛은 와인의 잔류 당분과 알코올에서 나온다.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이런 느낌을 ‘감미롭다’고 말한다. 와인이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다. 와인의 신맛은 혀 양끝을 꽉 조이는 듯한 느낌을 동반하며 침을 분비 시킨다. 와인의 쓴맛은 탄닌이 내는 맛인데 그리 좋은 맛은 아니며 거칠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이 쓴맛이 다른 맛과 결합해 복합적인 맛을 더할 때 품질 좋은 와인이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과일인 감이 시간이 지나면 단맛이 나는 것처럼 와인의 탄닌도 와인이 잘 숙성되지 않은 영(young, 어린) 와인일 때는 기분 나쁘게 떫고 쓴맛이 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와인의 원래 단맛과 탄닌의 단맛이 만나 복합적이고 미묘한 맛, 예를 들면 초콜릿 맛을 낸다. 그리고 신맛과 만나면 기분 좋은 쌉쌀한 맛을 낸다.
그리고 와인을 맛 볼 때 우리는 첫 맛과 중간 맛 그리고 와인을 삼키고 난 후의 맛의 여운을 느껴볼 수 있다. 우리는 와인의 첫 맛을 흔히 ‘어태크(attack)’라고 하고, 중간 맛을 그냥 ‘미들(middle)’ 그리고 맛의 여운을 ‘피니쉬(finish)'라고 부른다. 이 피니쉬가 오래가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다.
또한 맛과는 다른 차원으로 혀의 촉감이 있다. 와인이 입안에 들어가 거칠음, 부드러움, 볼륨감, 건조함, 톡 쏘는 탄산가스 느낌, 미적지근한 느낌, 차가운 느낌 같은 것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와인을 맛본 후에 입안에 머무는 와인의 맛을 느껴야 한다. 입안의 점막에 와인이 닿았을 때의 촉감, 와인에서 느껴지는 온도의 감각, 잇몸의 점액을 자극하는 와인의 산도 성분, 볼 주변의 근육을 수축시켜 마른 느낌을 느끼게 하는 탄닌 성분 등 입안에 머무는 와인의 느낌은 목으로 넘기는 순간까지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요즈음 쉽게 구할 수 있는 미국 산 와인은 오크보다는 스테인리스 용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관 용기에 따른 향의 변화가 없고 와인의 향의 차이가 없어 구별이 잘 안 된다. 물론 고급 와인은 예외이다.
비즈니스 테이블이나 즐거운 식사 시간이라면 와인을 들고 의식적으로 조명이 밝은 곳에 대고 색깔을 살피고 코를 깊숙이 집어넣어 냄새를 맡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와인 마시는 요령을 몸에 익히되 식사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식탁 매너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