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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힘"은 나의 수고로 이루어져야 한다.

박한표 2024. 11. 17. 12:32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15일)

몇일 전부터 다루고 있는 '도가구계(道家九階)', 즉 도에 이르는 9 계단을 다시 소환한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①부묵, 副墨)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②낙송, 洛誦),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 핀 다음(③첨명, 瞻明),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 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④섭허, 攝許),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⑤수역, 需役),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⑥오구, 於謳).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⑦현명, 玄冥), 조용하고 텅 빈 경지(⑧삼료, 參廖)를 체험한 다음 시원(始原)의 도(⑨의시, 疑始)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였다.

'섭허' 단계에서 '수역(需役)으로 넘어간다. 수역이란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거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이 말은 100% 다 맞는 말은 아니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유데모니아(eudaimonia)'라 불렀다. 이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본질적인 행복과 차별되는 순간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소확행의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도니아(hedonia)'라 한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수역'이 연결된다. '수역'을 일상에서 자신의 수고로움을 받아들인다로 해석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보았다.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소확행은 위에서 말한  유데모니아가 전제되어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서 여행을 즐기는 삶은 소확행이고, 열심히 일한 당신과 관련된 부분은 여행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데모니아이다.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열심히 일함을 통해 스스로 성장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여행만 다닌다는 것은 지루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소위 '불금'이 기다려지고 즐거운 이유는 주중에 유데모니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나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일 껍질을 벗기는 수고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과 같다. 자신의 수고 후에 얻은 소확행이 더 값지다. 마치 주요리를 먹지 않고, 디저트만 먹게 되는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재력과 체력 그리고 시간 여유가 있어서 유데모니아 없는 소확행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더라도 그 소확행은 결국 햇빛과 같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갈망해도 매일매일 해가 쨍쨍 뜨는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삶은 사막화되어 금방 황폐화된다. 삶의 목적을 자기 일과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성장체험인 유데모니아가 행복의 본질이다. 결혼의 경우도 두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성숙시키는 유데모니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유데모니아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혼생활은 그냥 지루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등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 명예, 권력을 획득하면 획득한 상태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몇 주 정도만 해복하다. 하지만 새로운 상태에 적응된 후에는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대치를 높이는 톱니바퀴적 성향 때문에 점점 더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해진다. 얻은 대가로 짧게 행복한 기간을 지내다 더 긴 기간 동안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톱니바퀴 효과"라 한다. 사막 효과도 결혼 생활의 경우와 같다. 돈, 명에,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면 이것들도 매일 내리쬐는 햇볕이 되어 삶을 지속적으로 사막화 시킨다.

시간 참 빨리 간다. 그럴 수록 여유를 찾아야 한다. 배연국 세계일보 논설위원의 블로그에서 읽었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앨리스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의 위치가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앨리스가 숨이 찬 목소리로 붉은 여왕에게 묻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우리가 한 것처럼 이렇게 오래 열심히 달리면 어딘 가에 도착해 있을 텐데요.” 그러자 여왕이 대답했다. “그것 참 느려 터진 나라로 구나. 이 나라에서는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힘껏 달려야만 한단다. 자리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만 하지.”

​"빨리 달리는 거울나라의 풍경은 우리 삶의 모습과 같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시간을 도둑맞은 것처럼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한자 바쁠 망(忙)은 마음 심(心)과 죽을 망(亡)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쁘게 서두르면 마음이 죽는다는 뜻이다. 마음은 행복이 머무는 곳인데 마음이 죽으면 행복이 어디에 머물 수 있겠는가"라며, 배연국 위원은 "행복을 느끼려면 아이들의 미소, 길바닥에 핀 들꽃 같은 소소한 풍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여유이다. 여유가 있어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 했다.

그러나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살아가는 힘"은 나의 수고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장자가 말하는 "수역(需役)의 단계가 아닐까? 네 일상의 번거로움을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까치처럼.

살아가는 힘/이옥주

큰 나무 밑
부러진 나뭇가지를 몇 번이고 물고 가는
까치를 보았다

가지를 잘게 잘라 놓아 주었다
부리에 물어 나르는 나뭇가지는
든든하게 집을 짓는 버팀목 되어
알을 품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둥지를 지으려 애쓰는 흔적이 보여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산다는 일은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이겨내며
도착해야 할 어떤 지점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시작하려 할 때 아보카도 씨를
빈 화분에 심었다

찬바람이 가까워지자 싹이 나왔다
모두 살아가기 위한 힘을 품고 있었다

행복은 자신의 실천을 통한 성장 체험과 직접 관련을 맺지만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성장체험을 한 경우에도 이어진다. 자신 때문에 세상이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상태를 구현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성장한 결과로 이런 상태가 만들어지고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이 더 활발해진다면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듯이 성장 체험을 통해, 더 성숙해짐에 대한 '되어감(becoming)'을 통해서 증진된다. 목표 자체의 달성보다 실천하며 달성해 가는 과정이 우리들에게 더 행복을 갖다 준다. 그리고 성장 체험의 본질은 지속적 학습을 통한 성장과 성숙이지 실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자신만의 일인칭 프로젝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중요한 이유는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이 자신의 목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킬 수 있는 목적을 각성했고 이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신만의 일인칭 프로제트가 있다는 유데모이나의 조건에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내 삶이 내재적 기준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쪼그라들고 있는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유데모니아가 없는 소확행에 빠져 살다가 결국 삶이 사막화 되면 무언가 더 심각한 것에 자신을 중독 시킨다. 소확행으로 행복을 쫓는 것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파랑새를 쫓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제된 행동과 학교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순자가 말한 "적토성산(積土成山)"("권학편")이라는 말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산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건 지적인 게으름일 뿐이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感)'에 맡겨 해버린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그리고 행복 하려면 먼저 자유로워져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행복했지만 어리석게도 자유를 요구했다가 광야로 쫓겨났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면, 행복한 호모 사피엔스는 존재하지만 자유로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동일한 것을 생각하고 동일한 것을 욕망하게 만드는 사고의 동일화와 본능의 획일화가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가 추구하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행복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진정한 행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자유의 발견에 있다. 다수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물리적 욕망이 아닌 정신적 욕망을 꿈꿔야 한다. 그것이 자유이고 행복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그 길이 쉽지는 않다. 사람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 하려면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용기를 내어 자신을 행해 쉼 없이 걷는 일이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이런 질문이 없으면 더 이상의 삶은 없다. 묻는 행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쪼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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